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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고 사랑스럽고 그래서 ‘퍼엉’ 터졌네

말풍선도 이름도 없는 그림 속에서 연인은 함께 책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낮잠을 자고, 서로를 배웅하고, 마트에 간다. 사랑의 소소한 일상을 포착해낸 퍼엉 작가의 그림책은 ‘연애 교과서’로 불린다.

어려서부터 조용하고 말수가 없었다. 말하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게 쉬웠다. 그림을 그리면 하고 싶은 말을 차분히 다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흰 종이를 채우는 동안에는 ‘무엇이 되어야겠다’라는 목표 같은 걸 생각하지 않아서 좋았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겠구나.” 미술 공부를 시킬 만큼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던 부모는 그림 대신 공부를 권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그림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부모가 박다미씨(필명 퍼엉·24)의 선택을 존중해준 것도 그즈음이었다. 박씨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 전공으로 진학했을 때 부모는 그 누구보다 기뻐했다.

지금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가 됐지만 시작은 단순했다. 대학 진학 후 일상을 돌아보니 정작 ‘내 그림’이 없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과제나 외주 작업이 아닌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일상에서 그림 소재를 찾았다. “단순한 편이라 쉽게 기뻐하고 크게 감동하는 편이에요. 행복하다는 감정이 꼭 특별한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별것 아닌 생활 속에서 빛나는 순간을 포착하는 거죠. 짧게 스쳐가더라도 행복은 행복이잖아요.” 이를테면 비싼 초콜릿을 아끼지 않고 한 입에 털어 넣었다거나,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하늘이 높아졌을 때 느끼는 사소하지만 기쁜 순간을 그림으로 옮겼다.

소소한 일상은 힘이 셌다. ‘별일 없이 산다’로 요약할 수 있을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도 잠깐의 반짝이는 순간은 있고, 그 순간에 기대 살아가는 게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린 그림을 이따금 SNS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본명보다 유명한 이름이 된 ‘퍼엉’이라는 필명도 그때 지었다. 필명에는 특별한 뜻이 없다. “필명이 이렇게 널리 알려져서 중간에 바꾸기 어렵다는 걸 알았다면 좀 더 신중하게 정했을 거예요. 많은 분들이 뜻을 물어보는데 아무 의미가 없다고 대답하고 나면 왠지 불성실하게 답변한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요.” 그러던 중 박다미씨의 그림을 눈여겨본 네이버 일러스트 전문 플랫폼 그라폴리오에서 초대장을 보내왔다. 웹툰도 아닌 일러스트를 연재하자는 제안이 처음에는 생소하고 낯설었다. ‘편안하고 사랑스럽고 그래(Love is…)’라는 시리즈명을 짓고 그라폴리오에 그림을 쌓아나갔다.

말풍선도 이름도 없는 그림 속 연인은 함께 책을 보고, 맛있는 걸 만들어 먹고, 낮잠을 자고, 서로를 배웅하고, 마트에 간다. 그림마다 ‘이렇게 껴안고 하루 종일 자요’ 같은 한 줄 정도 짤막한 설명과 제목을 달아둔다. “실제 있었던 일이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보편적이고 특별한 일상은 이제 박다미씨의 것만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기다리는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다.

업로드할 그림 한 편을 그리는 데 드는 시간은 평균 4시간이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짬이 날 때마다 그린다. 종이 위에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이를 스캔해서 포토샵으로 채색한다. 그릴 때 무엇보다 신경 쓰는 건 배경이다. 때로는 바다이고, 풀밭이고, 눈밭이다. 저 멀리 에펠탑이 보이는 등 이국적인 풍경도 눈길을 끈다. 그림의 주 무대인 방 모양이나 인테리어도 다양하고 독특하다. 그림 속 배경은 박씨가 임의로 만들어낸 공간이 대부분이다. 틈틈이 건축 관련 서적을 찾아보면서 ‘살고 싶은 집’을 그림으로 옮겼다. “그림에서 배경은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요. 배경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림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달라지거든요. 배경으로 인해 등장인물이 지닌 사연의 무게도 달라지는 느낌이라 더 많은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죠.”

박다미씨의 그림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고양이 가필드는 사실 길고양이다. 고양이를 좋아하기도 하고, 길고양이에 관심이 많기도 해서 그림 속에 꼭 넣는 편이다. 2014년에는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교육용으로 제작·배포한 동화책 〈고양이 역장 다행이야!〉를 작업하기도 했다(고양이 ‘다행이’는 수도권 전철 1호선 역곡역의 명예역장이 되기 전 유기묘였다). 

그림에 대한 반응은 해외 독자로부터 먼저 왔다. 문자 장벽이 없는 그림은 세계 각국의 SNS로 퍼져 나갔다. 현재 페이스북 페이지 ‘퍼엉(Puuung)’은 33만명이 구독하고 있다. 해외 독자 비중이 90%가 넘는다. 그림에 붙는 간단한 설명은 한국어와 영어로 동시 표기한다. 각국에서 그녀의 그림을 이용해 케이크나 이불 따위를 만들었다는 ‘인증샷’이 답지했다. 박다미씨의 그림으로 프러포즈를 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지난해 파리 도서전에 초대받아 갔을 때는 그녀를 만난 반가움에 울음을 터뜨린 독자도 있었다. 박씨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저를 ‘뿌엉’ ‘뽕’ ‘뿡’ 등으로 불러주는 외국인 독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귀여운 방귀 소리 같아서 혼자 떠올릴 때마다 웃곤 해요.” 지난해 7월 미국 크라우드 펀딩 업체인 킥스타터에서 후원금 13만 달러를 모았다. 애초 1만 달러를 목표로 했는데, 펀딩 오픈 2시간 만에 목표액을 채웠다. 킥스타터 내 일러스트 분야에서 모금액 기준으로 역대 3위에 오르기도 했다. 모두 예상 못한 일이었다. 70개국에서 18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녀의 작품이 담긴 아트북, 엽서집, 포스터 등을 받기 위해 펀딩에 참여했다. 해외 배송이 만만치 않았다. 리워드(보상) 상품을 제작하고 남은 금액을 모두 배송비에 사용할 정도였다.

‘이종석과 한효주가 내 그림을 따라 하다니…’

최근에는 차곡차곡 쌓인 그림을 모아 그림책 〈편안하고 사랑스럽고 그래〉(전 2권·예담)를 펴냈다. 그림을 책으로 모아놓고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런 그림을 책으로 만들어도 되는 걸까’ 처음에는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다음 책을 스스로 기대할 수 있게 됐어요.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어요.”

책이 출판된 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일도 있었다. MBC 드라마 〈W〉에 자신의 책이 ‘연애 교과서’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종석과 한효주가 내 그림을 따라 하다니….” 텔레비전을 보는 내내 신기했다. 5개국에 판권도 팔았다. 인도네시아와 타이완에 최근 출판됐고, 중국·브라질·베트남에서도 출간이 예정돼 있다. 다른 국가에서도 출판 문의가 계속 들어온다. 저작권 관리나 물병, 핸드폰 케이스, 에코백 등 그림 상품화는 그라폴리오에서 도와주고 있다.

앞으로 펴낼 3권에는 독자들의 사연도 담을 예정이다. 매주 수요일 ‘듣고 있어요’라는 연재를 통해 독자 사연을 받는다. 혹시나 다른 이들의 소중한 추억을 왜곡하게 될까 봐 사연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읽고 끊임없이 상상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드디어 만났어요〉라는 제목으로 그린 사연이다.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책 한 권으로 인연이 닿은 남녀가 이름도 얼굴도 모른 채 두 달 동안 도서관 책상 위 낙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마침내 책장 사이에서 만난다는 내용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페이스북을 통해 ‘라이브 드로잉’을 선보이고 있지만, 박다미씨의 그림을 원화로 직접 보고 싶다면 전시회장을 찾는 방법도 있다. 서울미술관 제3전시실에서 배우 하정우씨 등과 함께 사랑을 주제로 한 전시 〈연애의 온도〉를 진행 중이다(9월18일까지). 요즘은 졸업 학기가 되면서 졸업 작품 준비로 한창 바쁘다. ‘편안하고 사랑스럽고 그래(Love is…)’ 시리즈의 연장선에 있는 애니메이션이 될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일러스트와 또 달라서, 5분짜리 단편 하나 만드는 데 5000장이 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올해 말 작품이 완성되면 SNS로도 공개할 예정이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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